1. 1960년대 수출 주도형 산업화 전략의 추진
1960년대 정부 목표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 수출 주도형 산업화를 달성하고 소비경제 체제에서 생산경제 체제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수출을 증대시키기 위해 미국, 일본 등 선진국에서 원료를 수입해 국내에서 가공한 후 수출하는 노동집약적 전략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이러한 정부의 수출 주도형 산업화 정책은 세계적인 무역 기조가 보호무역주의에서 자유무역주의로 전환되는 국제경제 환경에 힘입으면서 성공을 거두었다. 선진국 내 산업구조가 고도화되면서 근로자의 인건비가 상승하였고 이에 따라 선진국들은 후진국으로부터 노동집약적 공업제품을 수입하기 시작하였다.
'수출만이 살길이다'라는 슬로건 아래 우리는 1964년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한 후 불과 7년 만인 1971년에는 10배에 달하는 10억 달러를 달성하는 위대한 성과를 냈다.
정부는 이에 힘입어 1970년대 초 '국민소득 1,000달러, 수출 100억 달러'라는 정책목표를 제시하며 경제체제를 기존 경공업 중심에서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1970년 7월에 완공된 경부고속도로는 전국을 일일생활권으로 통합하고, 완공 후 초기 10년간 화물의 수송을 16배 증가시키며 사람과 물자의 흐름을 원활하게 연결함으로써 경제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다.
대한민국의 수출은 1973년도에 전년 대비 98.6%가 증가하고 1960년부터 20여 년 동안 매해 평균 39.8%가 증가하는 등 경이적인 기록을 달성하였다.
< 수출 주도형 산업화 정책 >
국내 경제가 불황으로 치닫게 되면 국내 수요는 감퇴하고 공급이 남아도는 현상이 빚어지는데, 이러한 판매 위축을 막기 위해 국내시장보다는 외국시장 쪽으로 방향을 돌려 수출 신장 정책을 펴는 것을 말한다.
불황기에는 일반적으로 국내 수요가 감소하고 공급이 과잉되면서 기업의 가동률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기업은 가동률 저하를 방지하고, 재고가 많아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수출 가격을 인하해서라도 수출을 확대하려는 경향을 보이게 되며 이러한 수출증대가 경기회복에 도움을 주는 경우도 많아.
대한민국은 1961년부터 수출 주도형 산업화 정책을 펴기 시작해 자동차 · 조선 ·기계 ·전자 ·석유화학 ·반도체 등 주요 산업에서 획기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2. 1970년대 국가 기간산업 건설과 새마을 운동
노동집약적 경공업 제품의 수출이 증가하자 그에 필요한 원료와 중간재를 자급하기 위하여 석유화학공업 등 기간산업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울산의 석유화학공업단지는 1972년 준공되었고, 이로써 우리나라는 에틸렌, 프로필렌 등 기초 원자재에서 최종 제품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생산체제를 갖춘 석유화학 콤비나트의 보유국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정부는 제조업 및 중화학공업에만 중점을 두지 않고 농업과 농촌의 발전에도 힘썼다. 근면 · 자조 · 협동의 기치 아래 농민의 생활 자세와 의식을 개혁하고 환경을 개선하여 소득을 증대시키는 새마을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쳐 큰 호응을 받았다. 이 새마을 운동은 범국민적 운동으로 확산하며 생활환경을 크게 개선하였다. 1970년에 전기가 들어온 마을은 전체의 20%에 불과했는데 1978년에는 무려 98%까지 확대되었고, 농촌에서는 농로를 넓히고 마을 광장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전통 소농 사회의 마을이 근대적 공동사회로 발전하였다.
3.1970~1980년대 철강산업의 성공
'산업의 쌀'인 철강의 생산은 당시 정부의 꿈이었다. 이를 위한 종합제철소의 건설은 제2차 경제개발계획에서 중점사업으로 포함되며 많은 우여곡절 끝에 정부의 노력으로 1973년 6월 포항제철 제1기 설비가 완공되었다. 초기 포항제철은 철광석을 녹여 선철을 만드는 과정인 제철 능력이 103톤에 불과하였으나 세계 제철업 역사상 전례가 없는 발전으로 1981년에는 무려 850만 톤으로 성장하였다.
1985년 포항제철은 전남 광양에 또 하나의 제철소를 건립하기 시작했다. 광양제철소는 1992년까지 1,140만 톤의 생산능력을 갖추었다. 포항제철의 성공적인 건설과 사업 확장은 이후 추진된 중화학 공업화의 초석이 되었다.
공업의 발전이 노동집약적 경공업을 넘어 자본 집약적이고 기술집약적인 중화학공업으로 확산하기 위해서는 숙련된 기능공이 필요하기 때문에 공업고등학교 교육과 공공 훈련을 포함한 직업훈련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79년까지 19개 학교가 기계공고로 지정되어 정부의 지원을 받았다. 이를 통해 1972년부터 1981년까지 무려 100만 명의 기능공이 양성되는 등 대한민국은 제조업 국가의 기초를 튼튼히 하며 성장 · 발전하였다.
4. 1980년대 중화학공업의 육성
1970년을 전후로 노동집약적 경공업 제품의 수출만으로는 더 이상 고도성장을 지속할 수가 없었다. 더불어 1960년대 말, 1970년대 초 북한의 대남도발 및 미군 철수 움직임으로 인한 안보 위기는 방위산업을 필두로 해서 중화학 공업화를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다. 1973년 6월에 발표된 중화학공업 육성 계획은 철강, 비철금속, 기계, 조선, 전자, 화학 공업을 6대 전략 업종으로 선정하고 1981년까지 전체 공업에 중화학공업의 비중을 51%로 늘려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와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한다는 청사진을 제시하였다.
1975년 준공된 현대조선소가 준공 첫해부터 흑자를 실현하는 등 중화학 공업화는 애초의 목표를 초과 달성하며 고도성장을 이끌었다. 1980년 전체 제조업에서 중화학공업의 비중은 54%가 되었으며, 공산품 수출에서 중화학 제품의 비중은 48%에 달하였다. 공업구조의 이 같은 변화는 선진국에서는 100년 이상 혹은 수십 년에 걸쳐 서서히 달성되었지만, 대한민국은 1977년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하는 성과를 내며 짧은 기간에 중화학 공업화에 성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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